2004년 개봉한 영화 '아는 여자'는 일상에서 스치듯 지나칠 법한 두 남녀의 관계를 담백하고 현실적으로 풀어낸 감성 로맨스 영화입니다. 가벼울 것 같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감정선이 돋보이며,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금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죠.
출연진
한이연 (이나영): 자신에게 무심한 듯 하지만, 깊은 상처와 비밀을 간직한 여자. 야구 선수 동치성의 존재가 그녀의 삶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온다.
동치성 (정재영): 시한부 선고를 받은 프로 야구 선수. 좌절감 속에서 우연히 한이연을 만나고, 그녀와의 기묘한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 한다.
줄거리
치성의 몰락과 시한부 선고
동치성(정재영)은 한때 인기 있었던 프로야구 투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경기에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고, 이후 선수 생명은 물론 대중적 인기까지 잃는다. 그 사건의 배경에는, 관중석에서 “오빠, 헤어져”라며 남자친구와 이별을 고하는 한 여성의 외침이 있었다. 이 어이없는 순간에 정신이 팔린 치성은 제구를 놓치고,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은 하락세를 걷는다.
방송인으로 전향했지만, 라디오 프로그램은 점점 청취율이 낮아지고, 주변인들도 그를 외면한다. 설상가상으로 병원을 찾은 그는 의사에게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판정을 듣는다. 이 대사는 담담하지만 잔인하다. 치성은 허탈함을 느낀 채 술에 취하고, 스스로를 조롱하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다. 그렇게 죽음의 공포보다 삶의 무의미함에 더 절망하는 남자가 서사의 첫 주인공이다.
조용히 곁을 지켜온 ‘그냥 아는 여자’ 한이연의 등장
치성이 늘 가던 단골 술집. 그날도 만취 상태였고, 쓰러진 그를 한 여자가 모텔로 부축해 데려다준다. 다음 날 아침, 모텔에서 깨어난 치성은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여자는 은행원 한이연(이나영). 어릴 적부터 치성을 TV에서 지켜봐 왔고, 오랜 시간 10년 넘게 조용히 그를 짝사랑해 온 인물이다. 그는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연은 그저 “그냥 아는 여자”라며 조용히 웃을 뿐이다. 이들의 인연은 그렇게 어색하게 시작된다. 특별한 로맨틱한 설정도 없고, 호감도 일방적이다. 하지만 이연은 작은 사연 하나를 라디오에 보냄으로써 치성과의 교감의 실마리를 만든다.
치성의 혼란과 관계의 시험대
치성은 라디오 사연을 통해, 자신이 모텔에서 일어났던 황당한 이야기가 방송을 탔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곧 사연의 주인공이 이연임을 눈치챈다. 이후 둘은 또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연은 치성이 잃어버린 핸드폰을 주워 돌려주는 일도 생긴다. 이후에도 극장 티켓 당첨, 같은 거리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상, 치성이 출연한 방송을 묵묵히 응원하는 모습 등 이연은 계속해서 그의 곁을 맴돈다. 처음에는 이런 행동들이 부담스럽던 치성이지만, 점점 그녀의 진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연은 “서른아홉 발자국”만 걸으면 치성의 집에 도착하는 거리에서 늘 그를 상상하며 걸었다고 고백한다. 이 조용한 고백은 말없이 그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킨다. 두 사람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치성 역시 자신의 삶에 스며든 이연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는 순간. 갑작스럽게 치성이 살인 용의자로 몰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웃집 살인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던 치성은 언론과 경찰의 관심을 받으며 괴로운 시간을 보낸다. 대중은 그의 과거 방송인 시절의 이미지와 괴리를 느끼며 비난하고, 그는 진짜 범인이 아님에도 고립된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편에 서준 사람은 이연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그를 믿고, 묵묵히 곁을 지킨다. 하지만 치성은 그런 이연이 부담스럽고, 감정의 깊이를 감당할 수 없어 회피하게 된다.
결말
치성은 다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이연은 의사에게서 치성의 시한부 진단은 의료 사고였으며, 그는 멀쩡하다는 사실을 듣는다. 이연은 분노하면서도 씁쓸하게 웃는다. 그동안 치성이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이유가, 실은 오진이었다는 것. 치성 역시 사실을 알게 되고, 머릿속을 스친 건 단 하나. “이연에게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다. 치성은 용기를 내어 이연을 찾아간다. 그녀 앞에서 처음으로 솔직한 표정을 짓고, 말한다. 서로를 오랫동안 스쳐 지나가며 지켜본 두 사람의 관계가, 드디어 같은 선상에 놓인 순간이다. 대단한 키스신도 없고, 눈물겨운 포옹도 없다. 그저 한 마디와 그에 담긴 진심이 두 사람의 관계를 결정짓는다.
치성은 이연에게 "이름이 뭐예요?" "나이가?" "참 좋아하는 음식이.. 그게..." 그렇게 치성에게 사랑이 찾아오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상 후기
영화는 동치성(정재영)이 시한부 선고를 받는 충격적인 상황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결코 무겁게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원인으로 경기에서 실수를 범하는 치성의 모습(관중석의 이별 소동이라니!)이나, 라디오 사연을 매개로 기묘하게 이어지는 로맨스처럼, 일상 속 우연들이 절묘하게 사랑의 서막을 여는 전개는 신선하고 예측 불가능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이렇게 유쾌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역시 장진 감독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극 중 곳곳에 등장하는 엉뚱하지만 인상적인 조연들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풍미를 더하는 일등 공신입니다. 도둑과 형사, 이별을 외치는 여자 등 각양각색의 캐릭터들은 저마다 사랑에 관한 자신만의 '챕터'를 담당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들의 짧지만 강렬한 등장은 영화가 단순히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사랑의 다양한 얼굴들을 폭넓게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를 엿보게 합니다. 하지만 '아는 여자'가 단순한 웃음만을 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은 바로 메시지의 깊이에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달콤한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삶과 사랑에 대한 묵직한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절망적인 순간, 뜻밖의 인연인 한이연을 통해 치성이 삶의 의미를 되찾고 구원받는 과정은 진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동시에 여러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사랑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그 어떤 하나의 정의로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웃음 짓게 하는 장면 뒤에 문득 울컥하게 만드는 대사가 숨겨져 있고, 엉뚱해 보이는 상황들이 모여 결국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진솔한 통찰로 이어지는 연출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러한 연출 의도 덕분에 관객은 코미디를 보며 즐기다가도, 문득 자기 자신에게 '나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고 되묻게 됩니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여운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이유입니다.